9월 30, 2020

대한민국 임시정보가 수립될 수 있었던 전제 조건 – 경술국치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던 가장 큰 전제 조건은 대한제국의 멸망,

경술국치를 꼽을 수 있겠다.

대한제국은 1897년 고종이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며 칭제하며 성립한 국가였다.

이 대한제국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명백한 정부가 존재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대한 제국의 인민들이 직면한 최대 과제는 독립이었다.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한인들은 자치 기구를 설립하여 한인을 대표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자치기구의 역할은 정부와도 같았다.

특히 미주 대한인국민회를 그 예로 지목할 있다.

대한인국민회는 1910년 미주지역으로 이주한 이들의 자치기구로 정부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고,

이를 무형국가로 건설하자는 논의 역시 존재했다.

이러한 자치기구의 대표기구로서 등장한 것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인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으로 설립되어 여타 지역의 자치기구와 통합을 이뤄낸 후

국가와 정부로 존재하며 국민주권과 민주공화라는 가치를 정착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국호를 임시정부의 그것에 따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제헌헌법 전문에는 앞서 살펴보았듯 임시정부의 계승과 재건을 명문화 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와 동일한 연호를 사용했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1919년 대한민국과 1948년 대한민국은 서로 다른 국가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굳이 분리할 것 없이 1919년 임시정부로써 대한민국을 이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건국이 오롯이 1919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서만 비롯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3.1운동 자체를 놓고 보면 실질적인 정부수립이 아니었을 뿐더러

임시정부가 온전히 국민의 합의를 수용할 수 있었던 완전한 단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임시정부의 공훈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진정으로 국민적 합의를 이루었는지는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1919~1920년 초기를 제외하고는 임시정부를 전체적으로 우파적 민족운동가 세력이

주도했음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신채호로 대변되는 무장투쟁론 세력이나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 계열의 좌익 독립운동가 세력은

임시정부 내부에서 큰 인정을 받지 못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파국을 맞은 이후 창조파 뿐만 아니라 개조파까지 모두 임시정부를 떠났다.

이후에도 김원봉이 자신을 따르는 일부 세력만을 이끌고 임시정부에 합류하기 전까지

임시정부는 김구를 필두로 한 우파적 민족운동가 세력 중심의 독립운동 단체였다.

또한 독립 이후에도 임시정부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운형, 박헌영 등에게도 부정당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연합국에 승인되지 못했다는 점은 냉엄한 국제질서에 의한 것이니 둘째 치더라도,

1930년대 후반 이후 국내 일반 민중들에게 존재조차 희미했으며,

여타 해외 독립운동 단체들의 확고한 대표로서 존재하지 못했었다는 사실은

임시정부만의 정통성을 위태롭게 한다.

1919년으로 건국을 못박아버리는 순간 국민대표회의 이후 탈퇴한 이들과 단체뿐만 아니라,

독립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을 지지했던 이들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반국가단체 혹은 요인’의 형태를 띠게 된다.

1919년에 진행된 일련의 사건은 분명 한국사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을 건국 기점으로 쉽사리 확정하지 못하는 까닭은

임시정부 이외의 독립운동 단체나 인사들의 역사적 의의를 퇴색시킬 가능성이 존재하고

임시정부 자체가 온전한 형태로 지속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한민국 건국 기점 논쟁의 양축을 이루는 1919년 설과 1948년 설을

각각 주장하는 한시준 단국대 교수와 김명섭 연세대 교수는 2017년 8월 23일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 센터에서 벌인 토론에서도 뚜렷한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참고문헌 : 우리카지노주소https://dappcentral.io/